기억보단 기록을/2021

210730 :: 생각의 차이 - 의무가 나를 움직이게 한다.

수댕 su_dang 2021. 7. 31. 00:54


나는 천성이 게으른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돈을 많이 벌겠다든지, 세상을 뭐 이렇게 바꾸겠다든지,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딱히 없었다.
어릴 땐 다들 아무 생각 없이 까르륵하지 않나 싶지만 나는 삶에 의미에 대해 늘 고민하던 애늙은이였기 때문에.. 그런 것 치고는 이렇다 할 욕심 없이 단조롭고 게으른 어린 시절을 지냈다. 동네에 있던 한 쌀가게 아저씨는 항상 가게에서 선풍기 앞에 눕듯이 앉아 낮잠을 자곤 했는데(집에선 뭘 하는 걸까) 난 그게 부러웠다.

방학엔 거의 집에서 누워 있었고, 방학숙제는 항상 끝까지 미루다가 개학식 전날에 우다다 하곤 했다. 아침에 깨는 게 너무 힘들어서 엄마 잔소리에 겨우겨우 일어났고 늑장을 부리다 아슬아슬하게 등교했다. 신기하게도 학창 시절 중 지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말이다. 여하튼 집에서 가만히 누워있는 걸 너무 좋아하는 집순이었던 나는 학교가 끝나고 아이들이 놀자해도 강경하게 거부하고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갔고 집에서 책 보고 티비보고 망상하고 일기 쓰고 하늘을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하고 싶은 것은 있었다. 멍하니 누워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면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는 시간이 많았다. 무엇보다 요리를 좋아했고 요리사가 되어 내 식당을 차리겠다 다짐했다. 엄마가 오직 책만큼은 갖고 싶은 대로 사줬기 때문에 다양한 요리책, 요리사/외식경영인의 책을 보며 꿈을 키웠다. 일기 쓰는 것도 좋아해서 매일 일기로 내 생각과 꿈을 적어냈고 가족들과 식당을 다녀오면 내 나름대로 리뷰를 적었다. 생각해보니 그때부터 블로그를 할 걸 그랬다.

하지만 내 꿈을 위해서 지금은 수험공부를 우선시 해야한다는 생각에 게으른 몸이지만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바라던 대학/과는 아니었지만 서울 소재 대학의 식품영양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물론 화학식에 질려 자퇴하고 재수했지만 말이다. 답답했던 수험생 시절, 친구에게 했던 말이 있다. “난 00도 00도 배우고 싶어, 수능 끝나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만 할 거야.” 수험공부가 지겨워서 했던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나는 그저 누워서 노닥거리고 싶은데 지루한 시험공부만 주구장창 하고 있는 게 너무 싫었다.

이 생각은 대학에 들어오자 와장창 깨졌다. 수강신청이 망하면 내가 듣고 싶지 않은 과목을 들어야하는 씁쓸함이 있고, 단순히 학점만을 위해 나랑 안 맞고 어려워도 일단 해야 하는 공부가 있다. 교육 이수를 위해 따야 하는 자격증도 있고, 내 진로를 위해 쳐야 하는 시험도 있다. 하다못해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도 주기적으로 교육을 듣고 시험을 쳤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생계를 위해 싫어도 해야 하는 일과 공부는 끝이 없었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는 이게 너무 싫었다. 이런 것들이 합리적이면 모를까, 도저히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는 것들도 많았기 때문에 반항심만 들었다. 본투비 찌질이라 무슨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방황도 많이 해 학교 갈 시간에 아무 지하철역에나 내려 서성거리기도 했고 일부러 사람을 멀리하며 혼자만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걱정하고 이끌어주는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조금씩 생기를 되찾았다. 어떤 일이라도 일단 도전하고 열심히 하다보면 길이 열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론 학교에 꼬박꼬박 열심히 나가고 집중도도 좋아져 성적장학금도 받게 되었다. 대학생의 첫 의무인 학교생활에 집중하다 보니 다른 것들도 잘 풀려갔다. 아르바이트도 가뿐한 마음으로 나가게 되었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당장의 의무를 넘어 하고 싶은 일들이 눈에 보였다.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고 기관이나 기업에서 주최하는 콘텐츠제작/마케팅 활동에도 참여하며 추억과 경험을 쌓아갔다.

하기 싫다고 미루었던 일들을 용기내서 하다 보니 오히려 하고 싶은 일들을 하게 되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건 힘들다. 짬을 내 운동하는 것도 힘들고, 어쩔 땐 책읽는 것도 마냥 귀찮다. 일기쓰는 것도 다짐이 필요하다. 화장실 가는 것도 귀찮아 목이 말라도 물 안 마시고 참는 나지만.. 귀찮음을 이겨내고 일단 해본다. 의무로 시작한 일 덕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즐길 수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