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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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지대넓얕) : 제로 편 서평 (1) 우주와 인류의 시작
원래 팟캐스트는 잘 듣는 편이 아니었는데, 유일하게 꾸준히 들었던 게 지대넓얕이었다. 위트 있게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재밌어서 수시로 듣고 다녔다. 지대넓얕 책 1,2는 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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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베다 : 우주와 자아
- 위대한 스승들 : 왜 그들은 축의 시대에 등장했는가
'축의 시대'는 독일의 실존철학자 카를 야스퍼스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2500년 전의 시기를 말한다.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와 고타마 싯다르타, 중국에서는 노자와 공자, 고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가 등장했다. 이 시기에 왜 전 세계의 위대한 스승들이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급격한 도시화 인구 증가를 겪은 격동의 시기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자연을 자유롭게 누비던 인간은 도시에서 질서와 상징 체계를 품게 되었다. 이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좁히고 갈등을 일으켰고, 폭력과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류는 깊은 사유로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을 것이다.
스승들의 가르침은 2500년간 이어져 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기억은 희미해져갔다. 19세기에 이르러 등장한 과학주의 담론과 실증주의 철학은 오래된 가르침을 대체했고, 사람들은 처음으로 맞이하는 물질적 풍요에 마음을 빼앗겼다. 21세기의 기술 발전, 대중매체와 소셜 미디어는 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며 사람들을 소비하는 노동자로 충실하게끔 한다. 우리는 다시 혼돈 속에 빠진 것이다.
이 혼란을 멈추기 위해선 축의 시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500년 전, 인류가 맞이한 최초의 혼돈을 극복하기 위해 위대한 스승들이 어떤 가르침을 주었는지를 보고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기 위해서다.
- 역사적 배경 : 우리가 모르는 세계의 절반
3500년 전, 코카서스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아리아인은 여러 방향으로 퍼져나가며 다양한 지역에 정착하였다. 그 중 우리가 살펴볼 아리아인은 인도에 정착한 이들이다. 그들은 지금의 인도 지역으로 들어왔고, 원주민을 정복하고 그들과 섞이며 고대 인도인이 되었다. 그들은 <베다>를 들고 들어왔다. 베다는 산스크리트어로 지식, 지혜, 앎을 말한다. 종교적이고 신화적이며 철학적인 방대한 양의 문헌으로,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가장 오래된 문서 중 하나이다.
인도 사상의 뿌리가 되는 베다는 세계의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문서를 두 개 꼽아보자면 <베다>와 <구약>이 있다. 구약은 아브라함 계열의 3대 종교인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뿌리가 된다. 베다는 우파니샤드, 힌두교, 불교의 뿌리가 되며, 인도와 동양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인은 구약의 세계관에는 익숙하지만, 그와 함께 세계를 설명하는 베다는 낯설어한다. 하지만 나의 세계를 넘어서기 위해, 굳이 낯선 세계관인 베다를 알아야 한다.
베다는 핵심 경전인 상히타, 부속 경전으로 구분된다. 핵심 경전은 네 가지 문서로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아타르바베다를 말한다. 부속 경전은 브라흐마나, 아라니아카, 우파니샤드이다. 낯선 단어로 혼란스럽다면 <리그베다>, <우파니샤드> 정도는 기억해두자.
아리아인들은 세계에 대해 하나의 거대한 순환적 모형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자연, 신, 사제, 인간이 서로 물고 물리는 인과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자연은 인간에게 풍요를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가뭄과 고통을 주기도 한다. 아리아인들은 이러한 자연을 지배하는 자를 '신'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선한 신이 자연에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고, 이를 위해 탄생한 존재가 '사제'였다. 이 사제는 브라만이라고 불리었는데, 정교한 제사와 의례 활동을 통해 신을 돕는 자들이었다. 인간은 이러한 브라만에게 사례하거나 물질을 제공하며 신이 질서를 만들어가게 해달라고 의뢰했다. 자연이 보통의 인간을 움직인 것이다. 이렇게 신, 사제, 인간, 자연은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로 엮여 공존했다.
<베다>엔 이 복잡하게 연결된 세계를 정교하게 운영하기 위한 방법이 담겨 있었다. 신을 움직이는 제사 방법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고, 베다를 읽을 줄 알고 이에 따라 엄밀하게 의례를 행할 수 있는 브라만의 지위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브라만의 높은 신분과 권위는 고착되었고, 이것이 카스트 제도의 시작이었다.
- 베다의 신화 : 신에 대한 세 가지 구분
베다는 신과 우주에 대해서는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신에 대한 여러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세 가지 방식을 이해해야한다.
신에 대한 구분
다신론 : 초월적 능력자
유일신론 : 창조주
범신론 : 궁극의 전체
다신론은 신을 인간의 능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로 보며,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제우스, 아폴론, 디오니소스 등이 이에 속한다.
유일신론에서의 신은 세계의 창조자이자 유일한 지배자이다. <구약>의 하느님, 하나님, 야훼, 여호와, 알라가 이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범신론의 신은 특정 존재나 인격적 주체가 아니라 우주 전체, 혹은 우주의 근본 원리, 거대 법칙으로서의 신이다. 베다 신화의 브라흐만이 이 유형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다. 노장 사상의 도(道), 불교의 열반 혹은 공(空), 그리고 현대 물리학의 모든 것의 이론(ToE)이 그리는 세계가 여기에 부합한다.
<베다>에는 흥미롭게도 이 세 종류의 신이 동시에 등장한다. 자연과 인간의 감정을 관장하는 다신론을 넘어 이토록 많은 신을 낳은 창조주신을 만들어냈고, 그를 넘어 모든 것의 기원에 대한 더 철학적이고 근원적인 설명을 요구했기 때문에 범신론의 철학적 논의가 등장한 것이다. 피조물로서의 역할과 의무에만 그치지 않고 우주 전체와 자아의 본질은 어떻게 관계 맺는지에 대한 사유를 하게 되었다.
- 일원론의 시작 : 고대 인도인이 찾은 궁극의 지혜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방대하고 복잡한 내용 중에서 핵심이 되는 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했다. 그만큼 <베다>에 비해 현대인의 감성에 더 부합하고 잘 읽히는 면이 있다.
우파니샤드의 탐구 주제는 의외로 단순명료하다. 전체로서의 '세계, 부분으로서의 '자아', 그리고 이 둘의 '관계'다.
1. 세계
전체로서의 세계는 브라흐만이라고 한다. 이것은 자아 외부의 세계,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말한다. 우주와 물질, 시간과 공간, 사회와 제도, 인간과 동물부터 신까지 말이다.
2. 자아
아트만이라고 하며, 이는 자아 내면의 세계, 내 안으로 펼쳐진 모든 것의 근원을 말한다. 내가 품고 있는 관념과 기억, 모든 감정들을 일으키는 본질의 '나'가 바로 아트만이다.
3. 관계
브라흐만과 아트만은 하나이다. 방대한 양의 <우파니샤드>는 결국 '범아일여(梵我一如)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와 자아가 결국 하나라는 것이다. 이는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결론이다. 하지만 고대의 지혜로운 이들은 범아일여를 단지 언어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체험적으로 이해하려 했다. 이를 통해 궁극적인 지혜에 닿을 수 있으므로.
- 범아일여의 현대적 의미 : 자아, 세계 그리고 관계
범아일여를 이해하기 위해 세계, 자아, 관계에 대해 하나씩 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무엇인가
자아는 무엇일까? 일단 당연하게도, 내가 걸치고 있는 옷은 내가 아니다. 이는 벗어두자. 다음은 학생, 직장인, 주부와 같은 사회적 역할을 지우고, 누군가의 아버지, 딸이라는 생물학적 관계도 지워버리자. 그다음은 나의 신체, 지능, 기억, 언어 능력이다. 내 지능에 변화가 생겨도, 옛 기억을 상실하거나 새로운 추억을 쌓아도 나는 자신을 자신이라 느낄 것이다.
이런 것들을 다 벗어내면 세상을 관조하는 텅 빈 의식만이 남아있다. 특정한 상을 갖지 않지만 모든 상을 일으켜 세우는 순수한 가능성의 상태, 이것이 자아의 순수한 본질적 상태다.
세계란 무엇인가
세상에는 실재론과 관념론,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
우선 실재론은 상식적인 세계관으로, 세계가 자아보다 앞서 있다는 관점이다. 실재론에서는 세계가 고정되어 있다. 세계라는 것이 먼저 있었고, 나중에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서 그 세계 위를 걸어 다니고 있는 것이다. 실재론은 세계가 나의 존재와는 무관하게 외부에 진짜 있다고 믿는 관점이다.
다음으로 관념론에서는 자아가 고정되어 있다. 자아가 앞서 있고, 내면이 탄생하는 동시에 세계가 나의 내면세계에 드러난다. 나의 마음 혹은 의식은 유일한 실재이며, 세계는 그 안에 왜곡되어 비치는 이미지다. 우리가 세계를 본다는 것은 언제나 내 마음이 그려낸 이미지로서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내 앞의 세계는 그저 하나의 거대한 가상이다. 그래서 인도인은 이 세계를 환영이라는 의미의 '마야'라고 불렀다.
세계와 자아의 관계는 무엇인가
실재론과 관념론. 어떤 세계관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세계와 자아의 관계에 대한 이해까지 달라진다. 실재론은 결국 세계와 자아의 분리라는 이원론으로 향하고, 관념론은 세계와 자아를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일원론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고대 인도인은 자아의 세계와 미분리를 이해하고 탐구했다. 이 지혜의 이름은 범아일여로 표현되었다.
- 사회적 영향 : 내면을 탐구하는 자들의 시대
<베다>엔 신에 대한 엄격한 제사를 너무도 중요시함으로써 사제 계급인 브라만의 영향력을 과도하게 키웠다. 브라만 지상주의가 퍼져갔고, 그들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면서 브라만은 부패하고 타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파니샤드>는 진리를 찾아 브라만이 아닌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 것을 제안했다. 우파니샤드 이후의 사람들은 독자적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런 방법으로 구도를 하는 사람들을 슈라마나 혹은 사문, <베다>의 엄격한 전통을 따르는 이들을 브라흐마나 혹은 바라문이라 불렀다.
- 우파니샤드의 문제 : 모든 종교가 갖게 되는 고민
<우파니샤드>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집중해 깨달음을 얻어갔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명상과 수행에만 전념하는 출가자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내면을 탐구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지만,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이러한 개인이 늘어나는 것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인류 역사에서의 종교는 노동과 경제 활동을 신성시하거나, 사후의 처벌을 앞세워 국가가 개인에게 질서를 내재화하는 일을 돕는 등의 방식으로 국가와 사회의 요구에 부합해왔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진리 추구와 사회의 공적 요구 간의 충돌로 인해 종교나 사상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속과 탈속의 조화를 이루게 해 준 경전 <바가바드 기타>가 있다.
- 바가바드 기타 : 세속과 탈속의 화해
<마하라바타>는 총 18권으로 이루어진 장편 서사시로, 이 중 6권이 바가바드 기타다. <마하라바타>는 바라타족의 통일왕국에 대한 이야기로, 바가바드 기타는 슬픈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 왕자 아르주나와 그의 싸움을 돕는 크리슈나가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크리슈나는 전투 앞에서 갈등을 겪는 아르주나에게 자신의 의무를 겸허히 받아들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 행위에 대해 보상과 영광에 대한 바람 없이 행동해야 한다고.
우리는 중요한 순간에 우리의 의무에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우리가 그를 두려워하며 이게 다 무슨 소용인지 의문이 들 때, 크리슈나는 그 의무를 성실히 하고 그 결과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 힌두교의 세계관 : 인도 정신의 종합
인도 사상의 핵심은 범아일여이다. 하지만 현대 물질문명에 익숙해지고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 우리는 이 개념의 감을 잡기도 힘들다. 하지만 이 개념에 익숙해진다면 다른 고대 스승들의 가르침도 조금씩 익숙해질 것이다. 수많은 고전의 세계로 자유롭게 여행하기 위해서, 우리 내면의 세계관을 넓혀보자.
4. 도가 : 도리와 덕성
- 역사적 배경 : 신화와 역사의 경계는 어디인가
고대 중국은 삼황오제의 이상적인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현실적인 역사의 시대로 들어섰다. 주나라가 정권을 잡은 후 주나라의 왕은 자신의 친척이나 믿을 만한 신하를 제후로 삼아 넓은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하지만 이 제도는 300년이 지나 흔들리기 시작했고, 제후들은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었다. 이 혼란의 시기를 춘추전국시대라 한다. 이 혼돈 속에서 위대한 스승들이 태어나 가르침을 전파했다.
- 노자의 생애와 사상 : 탈속의 철학자
노자는 주나라의 천자를 섬겼으나 춘추시대 말기에 이르러 자신의 나라가 급격히 쇠퇴하자 이를 한탄하며 관직에서 물러나 은둔의 삶을 선택했다. 노자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 은둔의 삶을 살기 위해 성문을 빠져나갔을 때의 일이다. 관문의 출입을 관장하던 이가 노자의 범상치 않음을 깨달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하는 노자에게 가르침을 남겨달라 간청했다. 노자는 잠시 앉아 오천여 자의 글을 써주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도덕경>이다.
노자에 따르면 도(道)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고,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은밀한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 말의 의미를 말해보자면, 우주의 질서라고 하고 있다. 우주만물의 실체 또는 그 실체를 이루는 근본 이치가 도인 것이다.
덕(悳)은 자기 내면의 질서 혹은 내면의 본질 정도로 말할 수 있다.
노자는 도와 덕, 이 두 가지를 연결한다. 도 안에서의 덕, 덕 안에서의 도. 자아안에서 우주의 질서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 도덕경의 내용 : 우주의 질서와 내면의 질서
<도덕경>은 상편과 하편으로 구분된다. 상편 37장은 도에 대한 내용이 주가 되어 [도경]이라 부르고, 하편 44장은 덕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담고 있어 [덕경]이라 부른다.
상편 - [도경]
상편 37장은 도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논한다. 우리가 도라고 말한다고 한들 그것이 실제로 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도는 무와 유를 모두 아우르는 거대하고 근원적인 전체라고 한다.
하편 - [덕경]
하편 44장은 덕에 대해 다루는데, 상편에서 도를 막연하고 형이상학적으로 다뤘던 것과 달리 인간의 구체적인 행위와 태도에 대한 교훈이 많다. 뿐만 아니라 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인(仁), 의(義), 예(禮)의 실체를 덕과 비교하며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 노자와 공자의 만남 : 두 가지 삶의 태도
젊은 시절의 공자는 사절로 낙양에 갔다가 원숙한 노인인 노자를 만났다. 이미 예에 대한 학식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던 공자는 노자에게 물었다. "예란 무엇입니까?" 노자는 이렇게 답하였다.
"당신이 높이 평가하는 요순시대의 성현의 예. 그것을 말했던 이들의 기와 뼈는 이미 썩어 사라졌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그들의 말뿐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군자는 때를 만나면 수레를 몰고 거들먹거리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티끌처럼 누추하게 떠돌아다니게 될 뿐입니다. 내가 듣기로 진짜 훌륭한 장사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물건은 깊이 감추어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덕이 있는 군자의 얼굴은 마치 어리석은 듯 보이게 됩니다. 당신은 교만과 욕심을 버리고, 있어 보이는 얼굴빛과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모두 당신에게 이롭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에둘러 말했지만, 결국은 이런 말이다. '진짜 능력자들은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다. 당신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자신을 드러내고 욕심이 많아 보이니 조심하라.' 노자와 헤어진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새는 자신이 능히 날 수 있음을 알고, 물고기는 자신이 능히 헤엄칠 수 있음을 알며, 짐승은 자신이 능히 달아날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달아나는 것은 망에 걸리고, 헤엄치는 것은 낚싯줄에 걸리며, 날아다니는 것은 화살에 맞는다. 용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음을 이제까지 알지 못하였다. 오늘 노자를 보며 마치 용을 본 것만 같았다."
노자와 공자는 둘 다 혼란한 세상에 대응하고자 했으나, 그 방법은 정반대였다. 노자는 그곳에서 떠나고자 했다면, 공자는 그곳을 바꾸고자 했다. 탈속과 세속. 얼핏 모순되어 보이고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양극단의 가치는 어떤 면에서 인간 영혼의 보편적 무늬인지도 모른다.
- 공자의 생애와 사상 : 세속의 철학자
사생아로 태어난 공자는 출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틈나는 대로 주나라의 관제와 예법을 공부했다. 끈질긴 노력으로 점차 이름을 날렸으며, 30세가 되었을 때는 노나라에 중국 역사상 최초의 학교를 세우고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나라의 군주와 함께 바른 세상을 만들어나가고자 했으나, 그와 뜻을 함께 할 왕을 만나지 못하였다. 공자는 후학을 양성하는 데 몰두했고, 많은 이가 공자를 따르며 그를 모범으로 삼았다.
- 논어의 내용 : 인간 사이의 실천 덕목
<논어>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다. 공자가 직접 저술한 것은 아니고 공자 사후에 제자들이 정리했다. 논어의 핵심 사상은 '인(仁)'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는 극히 포괄적인 개념이지만, 공자 사상의 근원이자 유교 윤리의 최고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 공자 이후 : 유학의 발전
공자의 가르침은 현실에서 시작해서 현실에서 끝난다. 삶 이전과 죽음 이후를 말하지 않고, 사회 윤리나 정치 이념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와 인간의 본질 전반을 탐구하는 '철학'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는 자들이 많다. 그저 당연한 말의 나열일 뿐, 거시적 세계에 대한 전망은 부족한 사회 윤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유지와 관리엔 유용하나 어떠한 변혁과 혁신을 꾀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 때문에 공자의 사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 아시아 국가에서 있었다. 하지만 한동안의 비판과 논쟁이 지나간 후 공자에 대한 재평가는 최근 중국 경제의 성장과 함께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
- 공자와 노자의 차이 : 혼란을 멈추는 방법
공자와 노자의 차이는 그들이 다루고 있는 사상의 범위를 기준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노자는 도와 덕, 공자는 덕에 집중하고 있는데, 노자는 우주 전체의 근본 원리와 그것의 반영으로서의 인간의 행위를 다루는 데 비해 공자는 사회, 정치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의 인간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세계관의 차이는 언어와 행위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귀결된다.
도가사상에서 인간의 언어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기에 세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지 못한다. 한발 더 나아가 이러한 언어로 분쟁을 해결하려 한다거나, 학문의 체계를 잡는다거나, 사람을 교육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문제가 커질 뿐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는 그저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다. 노자는 이렇듯 무위를 통해서만 천하를 평화롭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유가 사상은 도가 사상과 정반대의 입장을 갖는다. 그들은 인간의 언어를 뜻을 전하기에 충분한 수단으로 파악했다.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통해 인격을 성숙시키고 올바른 행위를 하도록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올바르고 다듬어진 말을 통해 사람 사의의 분쟁을 해결하고, 학문의 체계를 잡고, 더 나은 사람으로 교육해야 한다. 유가 사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으로는 개인도 사회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모순되는 세계관이 특별한 갈등 없이 긴 시간을 공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사상이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탈속과 세속.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욕구가 도가와 유가를 통해 각각 반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 외래 종교의 유입 : 불교의 등장
도가와 유가가 조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둘 다 현세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내 삶의 문제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를 다룬다. 이런 현세적인 가르침은 많은 사람을 만족시켰지만, 일부의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현생 너머, 죽음 이후를 생각하며 영적인 문제의 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 말이다. 도가와 유가는 이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때 등장한 대안이 불교였다. 도가와 유가가 제시하지 못했던 세계를 제시한 불교는 동아시아의 3대 사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 신유학의 세계관 : 일원론으로의 귀결
송나라 출신의 유학자인 주돈이는 도가와 불교 그리고 음양론과 오행론을 접목하여 우주와 인간의 존재 원리를 체계적으로 밝힌 <태극도설>을 제시했다. 이것은 이후 유학이 성리학과 양명학으로 이어지며 우주와 인간에 대한 거대한 철학적 탐구를 가능하게 했다. 노자는 도와 덕의 본질을 밝히고 덕 안에서 도를 발견하고자 했다. 주돈이는 무극으로부터 태극, 음양, 오행, 인간으로 이어지는 발생 원리를 설명함으로써 인간의 존재 방식이 우주의 원리를 따르고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
5. 불교 : 자아의 실체
- 역사적 배경 : 불교는 어떻게 아시아에 영향을 미쳤나
인도에 정착한 아리아인은 원주민에게 동화되며 <베다>를 전파했다. 하지만 당시의 <베다>는 복잡한 형식 체계를 갖추고 고도의 형이상학적 담론을 다루고 있었다. 그렇기에 인류 문명의 초기를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낯설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원주민 중에는 <베다>에 도와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새로운 사상을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베다의 전통을 따르는 사제 계급을 브라흐마나, 베다의 전통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철학을 만들어가는 개별 사상가를 슈라마나라 불렀다.
붓다는 아리아인이 아니라 원래 그곳에 살던 토착 종족 공동체의 왕자로 태어났고, 당시에는 이미 바라문과 사문이 공존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붓다를 여러 사문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붓다의 가르침은 다른 사문 학파들이 자취를 감춘 것과는 다르게 유럽과 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되며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깊은 영감을 준 것인지, 붓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 싯다르타의 생애와 사상 : 출가와 깨달음
2500년 전, 지금의 네팔과 인도의 접경 부근 히말라야 기슭에 샤카이족의 작은 나라 카필라 왕국이 있었다.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범상치 않은 태몽을 꾼 왕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했다. 출산이 임박한 왕비는 친정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라는 작고 아름다운 동산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싯다르타를 낳았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의 네 방향으로 일곱 걸음을 걸었다. 아기는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을 내려 땅을 가리켰다. 그리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고 외쳤다. 이 말은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 이 세상이 모두 괴로움에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하게 하리라'라는 뜻이다.
왕자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축제에 히말라야 산속에서 수행하던 성자 아시타가 찾아왔다. 그는 운둔자였기에 나라의 소식을 알 수 없었으나, 카필라 왕국 하늘에 상서로운 구름이 떠 있는 것을 보고 훌륭한 왕자가 태어났음을 알아챈 것이다. 아시타는 왕자의 얼굴을 살피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세속에 있으면 전 세계를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하면 모든 이를 구제하는 붓다가 될 것입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아들의 출가를 막으리라고 마음먹었다. 모든 이를 구제할 붓다보다도 이 나라를 지켜낼 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왕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게 하고, 늙고 병든 이들은 성 안으로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놓고 왕자가 성 밖의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리라고 다짐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싯다르타는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성장해갔다.
청년이 되었을 때, 싯다르타는 성 밖의 세상이 궁금해졌다. 하인을 졸라 성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성 밖으로 나간 싯다르타는 늙어 등이 굽은 노인, 병들어 괴로워하는 병자, 죽은 이의 장례식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모든 이가 늙고 병들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떠돌이 출가 수행자 또한 보게 되었다. 그는 가진 것이 없는 남루한 자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끝없는 생의 괴로움을 끝나게 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
이러한 싯다르타의 심경의 변화를 눈치챈 왕은 싯다르타의 발을 묶기 위해 이웃 나라의 공주와 혼인시켰다. 왕자와 공주 사이에서 곧 사랑스러운 아이가 태어났다. 싯다르타는 아이에게 라훌라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이는 '발목을 잡는 자'라는 뜻이다. 깨달음을 위해 수행의 길을 떠나고자 하는 싯다르타에게 사랑스러운 아이는 발목을 잡는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모두가 잠든 밤 출가하였다.
싯다르타는 다른 수행자들의 수행법을 따라해보았다. 유명하다는 스승도 찾아가 보았다. 며칠간 단식을 해보기도 했다. 몇 년 간의 수행, 명상 끝에 그는 드디어 깨달음에 이르렀다. 깨달은 자, 붓다가 된 것이다.
- 붓다의 가르침 : 고통의 원인과 해결
불교의 핵심 교리는 사성제와 팔정도이다.
사성제는 고, 집, 멸, 도의 네 가지 진리이다.
고성제는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를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고통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인 4고에 애별리고(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고통), 원증회고(미워하는 이와 함께 해야 하는 고통), 구부득고(원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고통), 오온성고(인간으로 태어나게 된 다섯 가지 조건 때문에 비롯되는 고통)까지 더해 8고라고 부른다.
사람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이 괴로움을 냉정히 따져보면 8고의 범주 안에 모두 들어감을 알 수 있다.
집성제는 고의 원인을 제시한 것으로, 집착을 의미한다. 고통이 발생하는 원인은 두 가지다. 갈애(渴愛)아 무명(無明). 갈애는 그치지 않는 갈증, 갈망이며 무명은 알지 못함, 무지를 말한다.
갈애는 세 가지로 나뉜다. 아름다운 것, 맛있는 것, 안락한 것 등 오감을 통한 쾌감을 추구하는 욕애(欲愛).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유애(有愛). 허무주의적 태도로 삶을 포기하고자 하는 무유애(無有愛).
이런 개념들을 보면 혼란스럽다. 욕망을 추구하거나 영원함을 믿지도, 반대로 허무주의에 빠져서도 안된다니. 그럼 이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붓다는 이에 대해, 나라는 존재 자체가 없다고 말한다. 나라는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흩어지는 임시 상태일 뿐이라고. 붓다는 이 상태를 다섯 가지 요소인 오온(五蘊)으로 쌓여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오온은 색, 수, 상, 행, 식을 말한다.
색은 물질 요소로 육체를 말한다. 지금 이 순간 내 몸은 하나로 고정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오래된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가 태어나는 등 물질의 순환의 지속되고 있다. 피부 세포나 뼈의 조직 세포는 시간이 지나면 모두 새로운 것으로 대체된다. 우리 신체는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임시 상태일 뿐이다.
수, 상, 행, 식은 정신적인 측면을 말한다. 수는 감각과 감정을 말한다. 상은 심상, 영상 등을 말한다. 행은 의지와 같은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식은 앞서의 모든 마음 작용을 일으키고 종합하는 의식 활동을 말한다.
붓다는 이 다섯 가지 요소가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전부라 말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고정된 실체가 없이 끊임없이 모아지고 흩어질 뿐이다. 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고정된 자아, 불변하는 영혼을 갈망하는 집착을 낳게 된다.
그리고 붓다는 고통이 사라지는 원리, 멸과 도를 말한다.
멸성제는 깨달음의 상태이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한다.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면 된다. 멸성제는 집착을 지움으로써 괴로움을 없애고 해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이것이 열반의 상태다. 불꽃이 꺼진 후 깊은 고요와 적막의 상태. 온전한 평화가 최종 목표이다.
이렇게 집착을 지우는 구체적인 방법이 마지막 도성제다. 이는 해탈을 이루는 수행 방법으로, 여덟 가지 방법이 있어 팔정도라고 부른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목숨을 유지하고, 바르게 노력하고, 바른 신념을 가지고,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바르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느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다. 너무 금욕적이지도 않고 너무 방탕하지도 않은 절제. 너무 비겁하지도 너무 무모하지도 않은 용기를 예로 들 수 있다.
연기와 삼법인
오온이 불교가 바라보는 자아의 실체라면, 연기는 불교가 바라보는 세계의 실체다. 모든 현상이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짐을 가리킨다. 세상에 홀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얽히고설킨 인과의 톱니바퀴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만물도, 인간 사회의 모든 관계도 그 근본은 연기다.
연기는 유전연기와 환멸연기, 두 가지가 있다.
유전연기는 존재와 삶이 발생하는 방향으로의 연기를 말한다. 이것이 생겨 저것이 생기는 방향으로의 연기다. 사성제 중에서 고와 집이 이에 해당한다. 반대로 환멸연기는 존재와 삶이 소멸하는 방향으로의 연기를 말한다. 이것이 멸해 저것이 멸하는 방향으로의 연기다. 사성제 중에서 멸과 도가 이에 해당한다.
자아는 고정된 실체를 갖지 않고 세계 또한 고정된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 이것을 각각 무아, 무상이라 한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 고정된 것을 잡으려 할 때 집착이 생기고 우린 고통을 느낀다.
무아, 무상, 고. 이 세 가지는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삼법인(三法印)으로 정리된다. 삼법인은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 열반적정(涅槃寂靜)이 있다.
제법무아란 자아는 영원불멸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도 없이 변화한다는 뜻이다. 제행무상이란 모든 현상은 잠시도 멈춰 있지 않고 계속 생멸하고 변화한다는 뜻이다. 열반적정은 번뇌의 불꽃을 바람을 불어 꺼뜨리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불교의 궁극적 목표다.
- 불교와 베다의 차이 : 고정된 자아는 있는가, 없는가
붓다는 <베다>의 일부 가르침은 수용하였으나 아트만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았다. 자아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늘 변하는 존재라고. 하지만 그와 동시의 베다의 윤회설은 수용하였다. 하지만 자아가 실체가 아니라면, 어떻게 윤회를 하고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제자의 질문에 붓다는 독화살을 예로 들어 대답했다.
독화살을 맞아 쓰러졌다면, 독화살을 쏜 자가 누구인지를 따지기 전에 고통스러운 독화살을 빼는 것이 먼저다. 언제나 사람들은 철학적,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논쟁하는 데에 시간을 쏟는다. 하지만 붓다는 이 삶이 고통스럽다면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논쟁을 하며 방황하기보다는 직접 행동부터 할 것을 제안했다.
- 붓다 이후의 불교 : 계승과 분열
붓다가 80세의 나이로 입멸하고 1년 뒤, 500인의 제자들이 모여 동굴에서 회의를 열었다. 스승의 말씀을 남기고자 하였고, 이때 초기 불교 경전인 아함경이 완성되었다. 동굴에 모이지 못한 제자들은 따로 결집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를 굴외 결집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제자들 사이에 의견과 해석의 차이가 생겼고, 이는 점점 간격이 커져갔다.
붓다 입멸 후 100년이 되던 해 2차 결집이 있었다. 비구들의 사소한 행위가 규율에 맞는지 따져보는 모임이었다. 열 가지 행위를 따져보았고, 모두 잘못된 행위라는 결론을 내렸다.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던 승단과 승려들은 이러한 결정에 불복했다. 이들은 따로 독자적인 결집을 가졌고, 이를 대결집이라 한다. 이후 승단은 크게 둘로 양분되었고, 이를 근본 분열이라고 한다. 전통과 권위를 중시하는 상좌부, 새로운 해석과 유연성을 중시하는 대중부로 나뉘었다. 이 분열을 기준으로 인도의 원시 불교 시대가 끝나고 부파불교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근본 분열 이후 불교는 부파불교 시대로 넘어가, 다양한 분파가 생기고 경쟁 및 갈등이 생겼다. 물론 이를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각각의 분파가 불교 교리에 집중하고 깊이 해석하고 연구함으로써 학문으로써의 불교가 탄탄해져 갔다.
하지만 문제점도 생겼다. 불교의 교리가 너무 복잡하고 세밀해진 것이다. 교리 해석이 중심이 되어, 승가와 비구의 전유물이 되었다. 일반인은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석가 입멸 후 500년이 되었을 무렵, 인도에서 불교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스스로를 대승(大乘)아러 불렀다. 많은 이를 구제하는 '큰 수레'의 종교라는 것이다. 자신만의 구제가 아닌 이타적인 역할에 힘써야 함을 강조했다. 이후 대승불교는 동아시아로 전파되며 불교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했다.
- 불교 외연의 확장 :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이전의 부파불교, 대승불교는 대승불교가 나눈 기준이며 객관적으로 보면 부파불교는 남방불교, 대승불교는 북방불교라 부를 수 있다. 각각 북방, 남방 경로를 따라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지역으로 전파된 불교는 그 지역의 문화, 종교, 사상에 동화되며 다양한 종파를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불교의 핵심 개념인 사성제와 팔정도, 창시자인 부처와 그를 따르는 공동체인 승가를 인정하였다.
- 대승불교의 두 사상 : 중도와 의식
대승불교의 거대 산맥을 이루는 두 종파가 있다. 중관파와 유식파로, 중관파는 중도, 유식파는 의식을 중시한 종파라고 할 수 있다.
중도 사상에서는 세계, 자아 모든 존재가 연기이고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모든 현상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공(空)'의 상태이다. 그래서 중도에서 시작하는 중관파는 자연히 공 사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유식파에서의 의식은 곧 나의 마음이다. 유식파에서는 이를 유일하게 실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우리 의식을 끝까지 파고들어, 심층적 층위를 분석해냈다.
- 자아에 대한 두 가지 입장 : 진아와 무아
불교는 시간에 따라 다양한 종파가 생겨났지만, 기본적으로 자아의 고정된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를 무아론이라 하며, 불교가 다른 종교나 사상들 사이에서 독특함을 갖는 요소이다.
영원불멸한 자아가 있다는 '아트만'을 말하는 진아론,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으며 자아도 마찬가지라는 무아론. 이 다른 세계관 중 어떤 것을 택할지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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