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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서평]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3) 서양의 철학

 

 

6. 철학 : 분열된 세계


- 이원론의 세계 : 왜 서양 철학은 한계에 봉착했는가

 

동양의 철학적 사유가 일원론으로 시작된 반면, 서양은 이원론으로 시작되어 근대 이후에 이르러서야 일원론을 발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서양의 이원론적 사유는 세계와 자아를 분리하고 각각을 독립적인 실체로 파악함으로써 물질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빠른 성장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자연을 수단으로 여겨 개발하는 과정에서 생태계 파괴와 환경 교란으로 인한 기후 변화가 생겨났다. 학문 또한 근대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 앞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러, 철학에서는 칸트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의 분리를 극복해내었고, 신과 인간의 완벽한 분절을 전제하던 기독교에서는 독일 신비주의의 등장과 함께 일원론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현대물리학에서는 기존까지 배제되어왔던 관찰자의 존재가 화려하게 복귀했다. 이원론에서 시작된 서양 철학이 어떻게 일원론으로 나아가게 되었는지, 이번 장에서 살펴볼 것이다.


- 역사적 배경 : 유럽의 정신, 그리스

 

서구에서 그리스 고전기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유럽 문명과 문화, 철학, 예술 등 모든 분야가 이때를 모범과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는 다섯 시기로 구분한다. 에게 문명, 그리스 암흑기, 그리스 고졸기, 그리스 고전기, 헬레니즘 시대. 에게 문명은 크레타섬을 기반으로 하는 크레타 문명과 펠로폰네소스반도를 기반으로 하는 미케네 문명이 있다. 그리스 암흑기 땐 어떤 이유인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번성하던 미케네 문명이 빠르게 멸망했다. 암흑기라고 불리는 이유는 당시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 지역은 매우 혼란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고졸기엔 암흑기가 점차 극복되었다. 문자가 다시 사용되었고, 무역과 교류가 이루어졌다. 근대적인 의미의 학문 전통이 시작된 것도 이때였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마침내 문화가 꽃피며 그리스 고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황금기라고도 불리는 이 시대엔 그리스 문명이 가장 발달했다. 근대적 의미의 철학, 과학, 예술, 정치, 제도 등 거의 모든 분야는 그리스 고전기를 이상적 기준이자 모범으로 삼고 있다. 

 

수많은 도시국가가 교류하고 경쟁하는 가운데 강력한 폴리스들이 탄생했다. 아테네, 스파르타, 코린토스, 테베 등이 대표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친숙할 정도로 고대 그리스의 상징적인 중심 도시였다. 두 도시국가는 시대적 정세에 따라 협력하거나 대립하면서 공존했다.

 

우선 스파르타는 군사 조직 형태의 강력한 사회였다. 주변 지역을 정복하며 성장했고, 점령지의 주민들을 크게 페리오이코이/헤일로타이로 나누는 신분제에 따라 지배했다. 페리오이코이는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아들인 자들로, 시민권은 없었지만 비교적 자유로웠고 자취권을 보장받았다. 반면 헤일로타이는 끝까지 저항한 자들을 부르는 명칭이었다. 스파르타인은 이들을 국가 소속의 노예로 다루며 매우 가혹하게 대했다. 스파르타가 엄격한 신분 제도와 군사 조직 형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끝없는 정복 활동으로 페리오이코이와 헤일로타이의 수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거의 스파르타 시민의 스무 배에 달했다. 강인한 전사가 되어 반란을 막아내는 것이 스파르타인의 큰 목표였기에, 허약하거나 장애를 갖고 태어나는 자는 버려졌고 시민들의 사생활은 엄격히 통제되었다. 스파르타의 정치 체제는 왕정, 귀족정, 민주정이 결합된 형태였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와는 달리 오랜 시간 민주정을 유지했다. 이들은 시민에 의한 의사 결정과 정치적 자유를 추구했고, 이는 르네상스 이후 근대 유럽의 모범이 되었다. 물론 쉽게 얻은 민주제는 아니었다. 민주정 이전에는 집정관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정으로, 국가의 주요 정책은 아레이오파고스 회의라 불리는 귀족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허나 아테네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부른 식량 부족과 빈부 격차로 인해 계급 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각 계급들은 각자의 사정에 따라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아테네인은 솔론을 개혁적 집행자로서 선출하였다. 솔론은 신분을 네 등급으로 나누고 각 등급에 따라 참정권과 군사적 의무를 확정했다. 솔론이 죽은 후엔 참주제가 생겨났다. 참주제는 귀족의 권한을 축소하고 아테네 시민의 권리를 높였지만, 민주제를 요구하는 시민의 입장에서는 아직 과도기였을 뿐, 개혁되어야 할 정치 제도였다. 후에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제의 기초가 확립되었고, 이 개혁 이후 아테네는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안정을 얻었다.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이 두 도시 국가의 정치 제도가 서로 매우 다르며 동시에 표준이 되는 모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정치적으로는 소수의 지배 계급에 의한 엘리트주의였고, 경제와 문화 측면에서는 폐쇄적이고 경직된 특성을 가졌다. 반면에 아테네는 정치적으로 다수의 시민에 의한 민주제였고, 경제와 문화 측면에서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특성을 가졌다. 국가와 사회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모든 시대와 지역에서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정치 형태는 모범적인 참고서가 되어왔다. 

 

- 아테네와 스파르타 : 협력과 대립, 두 번의 전쟁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5세기 무렵 외부의 위협에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협력했던 전쟁으로, 그리스로 상징되는 서양과 페르시아로 상징되는 동양이 대립한 전쟁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은 당시 세계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기원전 499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된 이오니아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아테네는 군대를 보내 반란군을 지원했다.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는 군함 300여 첫으로 에게 해를 건너 곧장 아테네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폭풍을 만나 결국 1차 원정은 실패했다.

 

기원전 490년, 2차 원정이 시작되었다. 페르시아는 육로로 진군했고,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아테네 군을 마라톤 평원에 묶어두고 곧장 아테레를 공격하려 했으나 페이디피데스라는 병사가 쉴 새 없이 아테네로 달려가 미리 페르시아군의 진군 소식을 전했다. 페르시아 군은 이미 전투 준비가 끝난 아테네군을 발견하곤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다리우스 1세는 3차 그리스 원정을 계획했지만 그 전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기원전 480년 대군을 일으켜 3차 원정에 나섰다. 크세르크세스는 아시아의 모든 민족에서 군을 징발하여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스는 두려움에 휩싸여 많은 식민도시가 페르시아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항복했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3백 명의 친위대와 이웃 도시국가에서 모집한 수천 명의 병사만 대동하고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맞섰다. 그의 군은 전멸했지만, 페르시아군을 사흘 동안 묶어둘 수 있었다. 그동안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함대를 모아 살라미스라는 좁은 수로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했다. 대패한 페르시아군은 다시 퇴각해야만 했다. 

 

국력이 쇠퇴한 스파르타는 전쟁을 멈추고 페르시아와 협정을 맺고자 했다. 그러나 아테네를 중심르오 여러 도시국가들이 연합한 델로스 동맹은 전쟁의 주도권을 잡아 페르시아를 계속 압박했다. 기원전 449년, 아테네와 페르시아 사이의 협약이 맺어지면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쟁 과정에서 해상권을 장악한 아테네는 전에 없던 번영기에 들어섰다. 이는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위협으로 다가왔다. 결국 두 세력 간의 갈등은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위협으로 다가왔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은 경제적 이유를 넘어 정치 체제라는 이념의 대립까지도 내포하고 있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는 군사력과 경제력의 우위를 기반으로 그리스 고전 문화를 꽃피우고 민주제를 더욱 발전시켰다. 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국가들이 민주제로 바꿀 수 있도록 지원을 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소수의 시민이 다수의 페리오이코이와 헤일로타이를 지배하기 위해 강력한 신분제를 유지해야 했으므로 아테네 민주제가 확산되는 것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전쟁이 발발했고, 스파르타의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군사 운용, 아테네의 역병으로 인해 아테네는 항복하게 되었다. 아테네는 민주제를 폐지당하고 30인 참주 체제가 들어섰다. 하지만 민주제를 원하는 시민들의 저항이 계속되었기에 결국 민주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리스 전역은 혼란스러웠다.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이념과 이해관계로 대립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이런 고민과 의문은 혼돈 속에서 철학을 탄생시켰고, 위대한 스승이 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소크라테스가 태어났다.

 

 

- 소크라테스의 생애와 사상 : 사유하는 인간

 

서양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인 소크라테스지만, 사실 그가 직접 남긴 저서는 없다. 플라톤이 남긴 저서의 소크라테스가 전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말인지, 그저 플라톤이 남긴 말인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은 그나마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고, 후기 대화편으로 갈수록 플라톤이 스승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사유 체계를 전개했다고 본다. 하지만 이를 원본에 대한 왜곡으로 보거나 플라톤 저술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근거로 사용할 필요는 없다. 확실한 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유는 단절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고 완성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조각가 아버지, 산파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못생긴 외모로 또래 사이에서 종종 놀림을 받곤 했지만, 인내심이 강하고 느긋한 성격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그는 남루한 옷차림으로 아테네 광장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정의, 용기, 절제, 경건 등 인간의 덕에 초점을 맞춘 가름침을 설했고, 이에 많은 젊은이들이 따랐다고 한다.

 

그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카이레폰은 어느 날 델포이 신전에 가서 사제에게 신탁을 청했다. "이 세상에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사람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신탁은 "없다"고 나왔다. 당시 아테네에서의 신의 지위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카이레폰에게 이 신탁을 전해 들은 소크라테스는 충격에 빠졌다. 그는 아테네에서 지혜롭다고 소문난 이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려 했다. 하지만 결국 소크라테스는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그들보다는 덜 무지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것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최소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를 '무지의 지(無知_知)'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진리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식을 얻음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대답을 통해 스스로 세우는 것이라고.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들의 대답 속에서 모순점을 찾아 다시 질문하는 방법을 반복함으로써 사람들을 아포리아, 즉 막다른 길로 몰아넣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진정한 철학을 시작하길 바랐다. 이러한 대화 방법을 산파술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평생을 아테네인에게 진리에 닿는 법을 설파했지만,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말년에 기소당했다. 기소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청년들에게 그릇된 가르침을 전파하고, 아테네의 신이 아닌 다른 신을 믿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였고, 실제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스파르타와 연결되어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혐의를 쓰게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에서 변론의 기회를 가졌지만, 그는 변호보다는 당당한 충고와 가르침을 설했다. 결국 배심원들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은 간수를 매수해 그를 탈출시키고자 하였으나, 그는 도망치지 않고 태연하게 독배를 마셨다. 이는 이성적 올바름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따른 행위였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상가들에 비하면 이렇다 할 사상을 찾기 힘들다. 그는 특정 개념을 일관되게 설파하거나 자아와 우주에 대한 거대한 그림을 그려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철학의 모범으로 삼는 것은 그의 삶 때문이다. 자신의 철학을 설파하고 그를 실제 자신의 삶과 일치한 그이기 때문에 철학의 기원이라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 플라톤과 이데아론 : 이원론의 시작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숨이 끊어진 후, 20대의 플라톤은 위대한 스승을 잃었다는 슬픔과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는 두 가지를 가슴 깊이 새겼다. 첫째는 이성중심주의다. 이성적 판단과 진리 추구는 현실적 한계를 초월하고 죽음까지도 넘어설 수 있음을 스승을 통해 깨달았다. 둘째는 민주제에 대한 불신이다. 어리석은 다수에 의해 휘둘러 진리가 어두워질 수 있는 민주제를 부정했고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철인정치를 꿈꿨다.

 

서구 사상의 역사는 플라톤이라는 토대 위에 건설된 제국이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화이트헤드는 이런 말을 남겼다. "서양의 2천 년의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의 철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데아론이다. 이데아 세계란 절대적이고 완벽한 불변의 이상 세계를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데아의 세계가 진짜 세계이고, 현실 세계는 단지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 혹은 모사일 뿐이다. 그는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제시하며 이데아를 설명한다.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통해 진정한 철학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철학자는 단순히 많은 지식을 가지고 그를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너머의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데아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는 인간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다. 현실엔 완벽한 것이 없지만, 우리는 이성으로 이를 그려낼 수 있다. 마치 완벽한 정삼각형처럼. 우리는 불완전한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도덕적 선과 심미적 아름다움과 정의와 용기 혹은 기하학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플라톤은 우리 머릿속에 절대적이고 완벽한 이성적 개념이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의 영혼은 원래 이데아의 세계에 있었지만 육체를 갖고 이를 망각한 상태로 지상에 태어난다고. 이를 상기론이라고 한다. 지식은 현실의 경험에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면에 남아 있는 기억을 떠올림으로써 얻게 된다.

 

이데아론의 의미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오랜 기간 서양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불완전한 현실 너머에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세계관은 서양의 문화에 깊이 자리 박았다. 이 세계관은 세계의 분리로 이어진다. 서양인의 세계는 둘로 나뉜다. 하나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 다른 하나는 불완전한 현실의 세계.

이데아론은 이와 같이 세계를 둘로 분절한다는 의미에서 이원론적 세계관이 된다. 이 나눠진 두 세계는 서로 독립되어 있으며, 결코 융합되거나 단일한 근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원론적 세계관은 2천 년 가까이 서양인의 근원적인 사유 체계로 작동해왔다. 이는 장단점이 모두 있었다. 학문과 과학기술의 발달로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으나, 산업화로 인해 자연은 파괴되었고 침략전쟁으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다. 감정과 욕망은 불결한 것으로 낙인찍혀 교정받아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서구 사회는 세계 절반의 고통에 무관심했다.

 

이런 병리를 꿰뚫어 본 인물은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그는 유럽인이 병들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그 원인이 플라톤주의, 즉 이원론과 주체중심주의였음을 날카롭게 밝혀냈다. 니체 이후 서양 철학은 플라톤주의를 전복한다. 플라톤이 가치 절하했던, 생성되고 사라지며 변화무쌍한 불완전한 것들을 복권해내는 데 집중한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명명된 20세기의 사회, 문화,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등 전 분야에서 일어난 사상적 흐름의 실체다.

 

                                 
- 동양의 세계관과 서양의 세계관 : 인류라는 거인의 우뇌와 좌뇌

 

이제 우리는 동양의 위대한 스승들이 일원론적 세계관을 전개했음을 안다. 그들은 세계와 자아가 그 근원에서 분리되지 않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반면 서양은 플라톤 이후 이원론적 세계관을 토대로 발전했다. 세계와 세계의 분리, 자아와 자아의 분리, 그리고 세계와 자아의 분리.

서양의 이원론은 세계와 자아가 각각 독립된 실체이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세계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내가 죽고 나서도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관점은 실재론으로 이어진다. 세계가 실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양의 일원론은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지 않기에 이 둘의 존재를 통합적으로 고려한다. 쉽게 말해서 자아와 세계의 존재는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나의 탄생과 소멸은 세계가 함께 한다. 세계라는 것은 자아라는 그릇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원론적 관점은 관념론으로 이어진다.


- 관념론의 의미 : 눈앞의 세계는 진짜인가

 

실재론은 인식되는 외부 세계가 이를 인식하는 주체와 무관하게 독립해서 존재한다는 입장을말한다. 반면 관념론은 인식되는 외부 세계가 사실은 나의 내면세계라고 이해하는 관점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동양에서는 문명 초기에 관념론과 관련된 생각이 시작되었고 오랜 시간 많은 이에 의해 심도 깊게 탐구되었다. 하지만 서양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후로 이원론적 세계관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고, 이것은 자아와 세계를 분리된 존재로 파악하게 했으며, 이로 인해 외부 세계를 실재하는 세계로 받아들이게 했다. 그러다 17세기의 예비 단계를 거쳐 18세기 칸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지하고 심도 있게 탐구되었다.


- 칸트의 생애와 사상 : 외부 세계를 내면 세계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칸트는 17세가 되던 해에 대학에 입학해 6년간 철학, 수학, 물리학 등을 공부했다. 졸업 후에는 귀족 가문의 가정교사, 대학 시간강사, 왕립도서관 사서 등으로 일하면서 철학 연구를 이어갔다. 교수직에 몇 번 낙방한 그는 문학부 교수직 제의를 받았으나, 철학 탐구에만 관심이 있었던 그는 이를 거절했다. 47세가 되어서야 그렇게 원하던 철학과 교수직을 얻게 되었다.

 

칸트의 삶은 대단히 단조롭고 규칙적이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홍차를 마시고, 연구와 집필에 몰두한 뒤 손님과의 점심을 즐겼다. 오후 3시 30분엔 반드시 산책을 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칸트의 산책을 보고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 그가 산책 시간을 어긴 적은 단 두 번이었다고 한다. 한 번은 루소의 <에밀>을 읽다가, 다른 한 번은 프랑스혁명 소식에 대한 신문을 읽다가. 산책 후에는 가벼운 책을 읽으며 저녁 시간을 보냈고, 오후 10시가 되면 잠자리에 들었다.

 

칸트는 다른 사람들보다 늦었고, 삶은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규칙에 따라 천천히 나아갔다. 교수가 된 후 깊은 사유에 빠져 있었던 그는 58세의 나이에 <순수 이성 비판>을 출간했다.

8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글이라는 혹평이 난무했다. 극도의 난해함으로 내용에 대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기에 칸트는 이를 일일이 해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점차 지남에 따라 <순수 이성 비판>은 많은 이들에 의해 연구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중심을 지구가 아니라 태양으로 바꿈으로써 천문학의 대전환을 가져왔던 것처럼, 칸트는 물질적 대상의 위치를 외부 세계에서 내부 세계로 바꿈으로써 철학사의 대전환을 가져왔다.

 

칸트의 사상은 서구 지성사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고, 서양 철학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꿨으며, 이후 피히테, 셸링,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론을 꽃피우게 했다. 칸트는 이후에도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을 출간하여 그의 대표적 비판서 3부를 완성했다. 이후에도 철학뿐 아니라 정치, 사회, 윤리, 예술의 문제까지 서구 사회 전반을 탐구했다.

 

많은 이와 교류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연구에 몰두해 온 칸트는 81세인 1804년 2월 12일, 평생을 함께 해온 늙은 하인 람페에게 포도주 한 잔을 청했다. 그리고 잔을 비운 다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좋다(Es ist gut)."

 

순수 이성 비판

 

칸트의 대표작인 <순수 이성 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은 각각 인식론, 윤리학, 미학을 다룬다. 쉽게 말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각각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는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이 책들에서 비판이란 무엇인가를 비난하거나 문제점을 지적한다는 것이 아니라 한계를 제시한다는 뜻이다. 즉, 순수 이성이라는 것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지 못하는지, 그 경계를 명확히 하겠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순수이성이란 무엇일까? 순수이성은 인간의 '선천적 인식능력' 전체를 말한다. 선천적 인식 능력이란 경험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인식의 능력을 말한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인간의 순수이성은 다음의 세 가지 능력을 갖고 있다. 감성, 지성, (좁은 의미의) 이성.감성은 오감을 통해서 감각 자료를 받아들이는 능력이고, 지성은 개념화해서 판단하는 능력이며, (좁은 의미의) 이성은 추리하는 능력을 말한다. 정리하면, 순수이성 비판이란 인간의 인식 능력인 감성, 지성, 이성을 우리의 유일한 도구인 이성을 통해 점검하고 그 한계를 명료히 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칸트는 어떠한 학문이 탐구 대상을 탐구하기 전에, 우선 그 탐구 대상이 어떻게 우리에게 드러났는지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식 대상을 문제 삼기 전에, 인식 주체의 인식능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만 한다. 칸트의 빛나는 업적은 인류에게 이미 색안경과 같은 인식 능력이 이성에 내재해있음을 밝혀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특징을 체계적으로 설명했다는 데 있다.

 

- 철학사적 배경 : 인식론의 고민과 칸트의 답변

 

칸트 이전의 유럽인은 인식의 기반이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했다. 인식 중에서 참된 인식, 확실한 인식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였다.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며 믿을 거라곤 없어 보이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확실하고 참된 인식을 얻을 수 있을까?

 

유럽인의 대답은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었다.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이 그것이다. 이들은 회의주의나 허무주의를 뚫고 인류가 어떻게 확실하고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는지 발견하고자 애썼다.

 

우선 합리론은 인간의 선천적인 '이성'을 중시했다. 논리, 인과, 필연을 중시했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수학과 논리학 같은 연역법에 기초한 지식만이 확실하고 참된 인식을 보장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감각은 불확실하다. 합리론자들은 경험적 정보를 배제한 합리적 이성의 추구만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앎을 제공한다고 보았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이 있다.

 

다음으로 경험론은 합리론에 반대했다. 그들은 이성적 능력만으로는 유의미한 지식과 진리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경험론자들은 관찰, 실험, 체험을 중시했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자연과학과 귀납법이 확실하고 참된 지식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합리론과 경험론은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합리론은 본유관념, 즉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관념이 무엇인지에 대한 증거를 댈 수 없었고, 또 지식이 어떻게 확장하는지 설명하지 못했기에 독단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경험론 역시 자연을 관찰해서 종합하는 귀납적 명제만으로는 절대적이고 확실한 지식을 보장할 수 없으므로 결국 회의주의로 향하게 된다는 문제를 갖고 있었다. 칸트는 두 입장의 한계를 피하면서 인식의 확실성을 얻고자 했고, 이러한 질문에 11년간 매달린 끝에 답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는 칸트가 외부 세계를 내면세계로 옮김으로써 가능했다. 눈앞의 사물은 인식의 원인이 아니라 인식된 결과다. 즉, 인식 대상은 인식 주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식 주체의 내면에 있다. 내 눈앞의 사물은 내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이미 내 인식 과정을 통해 내 안에 그려진 심상(心像), 이미지인 것이다.

그렇다고 칸트가 외부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 지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을 뿐이다. 칸트는 이 드러나지 않는 외부의 무엇을 물자체라고 불렀다. 그는 진리의 기준을 '외부의 대상 세계'에서 '내면의 주관형식'으로 뒤집어 놓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칸트 이후의 현상학 : 이원론에서 일원론으로

 

칸트의 업적은 독일 관념론으로 계승되었다. 피히테, 셸링, 헤겔이 대표적이며, 특히 헤겔에 이르러 독일 관념론이 완성되었다. 헤겔 이후의 철학사는 흔히 헤겔 좌파와 헤겔 우파로 나누는데, 헤겔 좌파는 헤겔의 관념론을 뒤집어 관념 대신 물질을 강조하는 유물론으로 나아간다. 대표적으로 포이어바흐, 마르크스가 있다. 헤겔 우파는 헤겔의 거대한 절대정신을 비판하며 개체와 유한성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나아간다. 키르케고르, 니체, 사르트르가 대표적이다.